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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이 연결 되어있는 로마제국

 

로마의 지속적인 영향력

로마 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의 문화는 전 세계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술, 언어, 종교, 철학, 법률, 건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로마의 유산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에서 채택된 기독교는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나뉘어 여전히 전 세계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모두 로마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이슬람 건축 양식도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미국 헌법과 나폴레옹 법전 등도 로마의 체계적인 법률을 계승했으며, 현대 민주주의의 뿌리 역시 로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루마니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는 로마에서 사용되던 라틴어가 로망스어로 발전하여 오늘날 이들 국가의 주요 언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원형 극장인 콜로세움

콜로세움이 처음 건설됐을 때, 이곳에서는 해상 전투가 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기 80년, 황제였던 티투스는 특별히 훈련된 동물들을 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콜로세움에 물을 채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서 열렸던 유명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는 행사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기술로는 이런 것들이 불가능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물을 채우고, 군함이 들어올 만큼 콜로세움이 컸는지, 물이 새지 않게 어떻게 막았는지 등 여러 가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콜로세움 하면 일반적으로 검투사의 경기가 떠오르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입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으며, 이러한 공연들은 정부가 아닌 개인이 주최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넓은 공간에서 행사를 개최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는 주최자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또한, 행사를 통해 얻는 가문의 명예와 인기는 컸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은 동물 사냥이었으며, 수입된 야생동물들이 활용되었습니다. 사자, 호랑이, 타조, 코뿔소 등이 특히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경기 전에는 정교한 세트장을 만들고, 관중들은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싸우는 검투사들에게 환호를 보냈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를 정복한 기념으로 열린 대규모 행사에서는 10,000명의 검투사가 목숨을 잃고, 11,000마리의 동물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주로 노예나 전쟁 포로 중에서 용맹하고 운동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검투사로 선발되었습니다. 위험한 직업이었지만, 검투사가 되면 다른 노예들과는 다른, 더 나은 생활환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승리한 검투사는 영웅으로 대우받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로마 제국의 기본 지식

로마 제국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됩니다. 이 지역은 지중해를 건너온 그리스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이주민들은 테베레 강 근처에 정착하여 생활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것이 로마 제국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두 아이가 테베레 강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의 이름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였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습니다. 형제는 잘 지내다가 결국 싸움이 벌어졌고,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게 됩니다. 살아남은 로물루스는 세력을 키워 3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로마라는 작은 도시국가를 세웁니다.

 

초기 로마는 농업과 목축업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로물루스는 왕으로 선출된 후 원로원이라는 최고 의결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로마는 단 한 명의 왕이 아닌 총 7명의 왕이 번갈아 가며 통치했는데, 이는 중앙 권력이 집중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튼튼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왕의 독재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왕정에 저항하여 공화정을 세웠습니다. 이 사건은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여서 그런지, 그리스의 민주주의 도시국가 운영 제도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510년,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로마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로마가 로마노 전쟁에서 승리한 후,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지중해에 만족하지 않고, 아시아와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북유럽의 영국까지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현재 영국의 수도인 런던도 로마의 영향을 받아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인프라로는 너무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웠습니다.

 

1인의 권력이 정복지 속주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커진 것도 문제였습니다.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인물이 등장했는데, 그는 매우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 북유럽, 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 걸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로마의 원로원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공화정을 유지했지만, 카이사르는 황제와 비슷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암살당하고 맙니다. 로마인들은 카이사르의 업적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