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가 '이란'으로 변한 과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처음에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고대 이란 지역에 거주했던 파르스라 불리는 부족이나 그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키루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우면서 파르스 출신 사람들이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파르스/파르사 지역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페르세스 또는 페르시스(Perses)로 알려지며, 서양에서는 페르시아로 널리 인식되었습니다.
또 다른 명칭인 "이란"은 원래 인도유럽어 계열의 "아리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히틀러에게도 잘 알려진 아리아인은 원래 이란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베스타를 거쳐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는 이 명칭이 확립되었습니다. 비시툰과 낙시에 로스탐의 비문에서는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자신들을 아리아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아리아(ārya, ariya)로 불리던 이 명칭은 사산 왕조 시대에 중세 페르시아어 또는 팔라비어로 에란(ērān)으로 변하였고, 이것이 현재의 "이란"으로 발전했습니다.
두 명칭 중 현지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것은 "이란"이었습니다. 당시 이란 지역의 여러 종족들은 각기 다른 출신지와 종족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언어적, 문화적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현재 이란의 국경과 유사한 지역을 지배했던 파르티아 시기에는 "아리아인"이라는 종족 개념이 점차 넓어졌습니다. 아리아인의 개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케메네스 왕조는 페르시아인이 주도했으나,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사는 다민족 제국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파르티아 역시 다민족 제국이었으나, 여러 이란계 종족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함께 살아가면서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시아는 오늘날 어떤 국가로 남아 있을까?
역사적으로 "파르스(Pār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페르시아는 학문적인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파르스(Fārs)"라는 용어가 더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는 아랍어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것입니다. 페르시아어에서는 [p] 발음이 [f]로 변하여 아랍어에서 "파르스"로 표기되었고, 이 표현은 나중에 페르시아어로 다시 도입되었습니다 (예: 파르시어, zabān-e Fārsi).
서구 세계에서는 '이란'을 '페르시아'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실제로 이란 내부에서는 자국을 '이란'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1935년 3월 21일, 팔라비 왕조의 레자 샤는 국가의 공식 명칭을 이란으로 확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완전히 변경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내부에서 사용하는 명칭과 일치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중국어에서는 "파사(波斯)"라고 표기되며, 이는 성경에서 언급되는 '바사'가 사실상 페르시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승자는 누구일까?
로마가 유럽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것처럼,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이란, 중앙아시아 등 독립적으로 발전한 다양한 문화권을 최초로 하나로 묶어 세계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이는 성경에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산 왕조가 몰락한 후 페르시아가 이슬람 세계로 통합되었음에도, 이란의 풍부한 문화와 학문, 과학적 업적은 그리스 및 로마 문화와 함께 화려한 이슬람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슬람 칼리프 시대에는 아랍인들이, 셀주크 시대 이후에는 튀르크인들이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지배권을 행사했으나, 실제 정부 운영은 대부분 페르시아인들이 맡았습니다. 군인들 사이에서는 튀르키어가,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아랍어가, 학자와 관료들 사이에서는 페르시아어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오스만 제국 시기부터 20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오스만 시대에는 왕립학교(Mekteb-i Şahane)에서 기본적으로 페르시아어를 교육받았고, 어린이들이 코란과 아랍어를 배우던 종교 학교에서는 문자 교육과 기본적인 학문도 함께 다뤘습니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현재 이란의 국경을 넘어선 지역인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이라크, 바레인, 시리아 동부, 튀르키예,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러시아의 체첸과 인구셰티야, 다게스탄 등이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지역을 현대 이란 국가와 구분하기 위해 대 이란(Greater Iran)이라 부릅니다. 이는 사산 왕조 시대에 확립된 이란의 정체성이 넓은 지역에 걸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란의 현대적 지위와 그 국경 설정, 그리고 시아파를 국가 종교로 채택한 사실 등은 주로 16세기에 설립된 사파비 왕조 시기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페르시아를 시아파의 발원지로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 시아파가 이란에서 주요 종파로 자리잡은 것은 17세기 사파비 왕조 시기부터이며, 그 이전까지는 페르시아가 주로 수니파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10-11세기의 부와이 왕조와 타바리스탄 지역의 몇몇 왕조(알라비, 바반드, 아사신 등)를 제외하고는, 페르시아는 오랫동안 수니파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와 시아파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는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더 나아가, 수니파 교리의 기초를 마련한 셀주크 제국의 중심 인물인 니잠 알 물크 역시 이란 출신이었습니다.
9세기의 아바스 왕조로부터 11세기 셀주크 제국, 그리고 14세기의 일 칸국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를 지배한 왕조들은 대부분 수니파였으며, 이들은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영토들도 지배하면서 광범위한 영역을 통치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시아파는 종종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현대 이란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시아파를 국가 종교로 채택한 사파비 왕조의 역할은 이란의 현대적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페르시아 문화는 지리적 범위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 영향력은 한때 북인도 동부까지 미쳤습니다. 특히 벵골 지역에는 벵골 술탄국 시대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렸으며,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벵골 지역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고르 왕조와 델리 술탄국 시대에도 투르크계 지배층에 의해 일부 페르시아화가 이루어졌으며, 이슬람과 페르시아식 이슬람 문화의 전파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