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나 카르타는 무엇인가?
마그나 카르타(라틴어: 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 영어: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는 1215년 6월 15일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서명한 문서로, 왕의 권한을 공식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문서는 왕이 여러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준수하며, 왕의 권력이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왕의 권력을 문서화하여 절대 군주의 전횡을 제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언급되지만, 실제 문서에는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부족하다. 이 문서는 후대에 국왕과의 갈등에서 민주주의의 시사점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원래는 귀족들의 권리를 확인하는 봉건적 문서였으나, 17세기에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특히,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scutage)과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또한, 제39조는 자유인은 동등한 신분의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나 감금될 수 없다고 규정하여, 보통법재판소에서 재판을 요구하는 기초로 크게 활용되어 금과옥조(golden section)로 여겨졌다.
이처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상기되고 인용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 영국의 헌정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마그나 카르타의 주요 조항
- 제12조 오랜 전통으로 인정된 것 이외의 세금이나 봉건적 기부금은 귀족들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부과할 수 없다. 하지만 왕이 인질로 잡혔을 때의 몸값, 왕자의 기사 작위 비용, 왕녀의 결혼 비용 등은 예외로 한다.
- 제21조 대귀족은 같은 계층의 귀족들에 의해서만 처벌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큰 죄목, 예를 들어 반역죄 등에만 해당한다.
- 제39조 자유민은 동일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합법적인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추방, 재산 몰수 또는 어떤 형태의 고통도 받지 않는다.
이 조항들로 알 수 있듯이 마그나 카르타는 성직자, 귀족, 그리고 봉건 제후의 권리를 보호하는 문서였다. 또한 이 문서에서 자유민이란 성직자, 귀족, 자유 시민(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가진 평민)을 의미한다.
왕의 영향력은 감소 했을까?
결과만 보면 왕의 영향력은 감소한 게 맞다. 하지만 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단기적으로 힘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에게 귀족들을 고발했고, 강력한 교황권을 지닌 인노첸시오 3세는 "감히 왕을 협박해?"라며 이를 무효화하여 마그나 카르타는 실효성을 잃었다. 그 후 바로 일어난 내전에서 헨리 3세의 후견인인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왕당파가 프랑스군과 연합한 반란 귀족들을 완전히 격파하여 사실상 소멸시켰다. 또한 존 왕의 뒤를 이은 헨리 3세는 "너희가 내 아버지와 약속한 것이지, 나와 한 것이 아니잖아?"라며 이를 무시했다. 사실 마그나 카르타는 '존 왕의 권리 제한'이 목표였다. 헨리 3세도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긴 했으나 내용을 많이 수정했고, 나중에는 무시해버렸다.
시간 지나 마그나 카르타가 가져온 돌풍
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왕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한은 대폭 강화되었다. 이는 곧 의회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본래 상류 귀족들만을 위한 문서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르주아 시민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12조에서 언급된 왕의 과세권 제한은 이후 권리 청원과 권리 장전 등 영국 부르주아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고, 영국 의회 정치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세 후반기인 13세기에서 15세기 동안, 서유럽 여러 지역에서 대의제의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를 계기로 탄생한 잉글랜드 의회는 초기에는 남작들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나, 에드워드 1세 시기부터는 기사 74명(각 샤이어당 2명), 부르주아 80명(각 도시당 2명), 하급 성직자 148명으로 이루어진 하원이 정기적으로 소집되기 시작했다. 1275년 웨스트민스터 법령은 '왕국 공동체의 조언과 승인으로' 공포되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는 마그나 카르타를 최종적으로 인정하고,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1320년경에 작성된 <의회를 여는 방법>이라는 책은 '왕국 공동체'를 대표하는 기사와 부르주아들이 이미 위대한 백작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인 1302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4세가 최초로 총신분회의를 소집하며 자신의 왕권이 왕국 공동체의 '선출'에서 기원한 것임을 강조하여 모든 계층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이때부터 프랑스 왕은 '왕국 내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이론적으로는 국민의 동의를 받았을 때만 유효했다. 프랑스 민중이 이때 받은 명목상의 권리를 실제로 행사한 것은 500년 후의 일이었다.